한국프로농구 또는 KBL(Korean Basketball League)은 사단법인 KBL이 주관하는 대한민국의 프로 농구이다. 1997년에 시작됐으며, 그 전까지는 실업, 대학, 국군체육부대가 포함된 농구대잔치가 인기를 끌었다. 프로 농구가 생긴 이후로 대한민국 농구에도 외국인 선수가 뛰게 됐고, 대학팀은 대학 리그에 참가, 국군체육부대는 D리그에 뛰고 있다.
경기 시간은 1쿼터에 10분씩 4쿼터를 치르는데, 1쿼터와 2쿼터, 3쿼터와 4쿼터 사이에는 각 2분씩, 그리고 2쿼터와 3쿼터 사이에는 12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농구공도 둘레 754.3mm, 무게 615g이며, 심판도 3명, 공격 제한 시간 24초, 팀 파울도 각 쿼터마다 5번째 파울부터 적용하여 상대팀에 프리스로를 주게 되어 있다.
한국프로농구는 1997년 출범 당시부터 현재까지 10개 구단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신생 구단은 창단되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농구연맹(KBL)이 프로 농구 출범 당시에 남북한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신생 구단 창단을 허락하지 않고 10개 구단 체제를 유지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프로-아마농구 최강전입니다.
프로-아마농구 최강전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농구연맹 주관의 농구 대회다.
프로와 아마를 아우르는 토너먼트 형식의 농구대회로, 프로 10개 구단과 대학리그
상위 5개 학교, 신협 상무 등 총 16개 팀이 출전한다.
KBL 컵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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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컵대회는 2020년부터 한국농구연맹 주관의 농구 대회다. 비시즌 대회로
컵대회가 신설됐으며 한국프로농구 10개구단과 상무를 포함해 11개 팀이 출전한다.
역대 우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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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 우승 | 준우승 | 우승 연도 | 준우승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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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 7 | 3 | 1997, 2007, 2010, 2013, 2014, 2015, 2019 | 1998, 1999, 2006 |
부산 KCC 이지스 | 6 | 5 | 1998, 1999, 2004, 2009, 2011, 2024 | 2000, 2005, 2010, 2016, 2021 |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 4 | 1 | 2012, 2017, 2021, 2023 | 2022 |
원주 DB 프로미 | 3 | 6 | 2003, 2005, 2008 | 1997, 2004, 2011, 2012, 2015, 2018 |
서울 SK 나이츠 | 3 | 3 | 2000, 2018, 2022 | 2002, 2013, 2023 |
서울 삼성 썬더스 | 2 | 3 | 2001, 2006 | 2008, 2009, 2017 |
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 | 2 | 1 | 2002, 2016 | 2003 |
창원 LG 세이커스 | 0 | 2 | — | 2001, 2014 |
수원 KT 소닉붐 | 0 | 2 | — | 2007, 2024 |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 0 | 1 | — | 2019 |
한국여자프로농구 (WKBL)
한국여자프로농구(韓國女子프로籠球, 영어: Women’s Korean basketball League, 약칭: WKBL)는 한국여자농구연맹이 주관하는 대한민국의 여자 프로 농구 리그이다. 여자 실업 농구를 확장하여 1997년 2월 24일에 설립되었고, 정식 출범은 1998년에 이루어졌다.
1998년 여름리그를 시작으로 1년에 두 차례씩 겨울리그와 여름리그를 운영했었으나, 2007-08 시즌부터는 단일리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2군 리그인 퓨처스리그도 운영 중이다.
처음에 다섯 개 팀으로 운영되던 리그는 2000년 4월 금호생명(현 BNK)이 농구단을 창단하면서 현재 여섯 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1년 여름리그부터는 연고지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국여자프로농구는 대한민국의 다른 프로스포츠 리그들과 달리 경쟁이 치열한 대도시보다 중소 도시들을 연고지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출범 배경
1960년대에 인기나 수준 면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여자농구는 불세출의 스타플레이어 박신자 선수가 코트를 떠나면서 갑작스레 퇴색하기 시작했다.그럼에도 1980년대 초까지 여자농구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실력으로 남자 농구에 비해 더 인기가 더 높았다. 하지만,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남자 농구가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상황은 역전되었고,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자 농구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에 여자 농구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규모에 비해 13개로 많았던 실업 팀의 구조 조정부터 시작해 갈수록 입지가 줄어드는 여자 농구의 입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미프로 형태로 리그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 측은 급락한 여자 농구에 굳이 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고 여겼고, 선수 입장에서도 굳이 안정적인 직장을 잃어가면서 프로 선수가 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남자 농구의 경우, 1990년대에 농구대잔치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기업 측에서도 돈이 된다고 뛰어들었고, 선수들도 실업 팀 급여보다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상황이었지만, 여자 농구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임은 있었지만 계속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한 상황 속에 찾아온 1997년 외환위기는 여자 농구의 프로화를 촉진시켰다. 13개나 달하던 팀이 경제 위기로 인해 순식간에 5개로 줄어들면서 이제는 프로화를 통해 이슈를 부각시키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지지부진하던 여자 농구의 프로화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